9-4. 복음에 대한 반응?

복음을 만난 사람은 자신이 죄인이라고 말하고,

복음을 만나지 못한 사람은 남을 죄인이라고 말한다.

복음은 사람의 존재와 하나님의 실체를 보게 하는 눈이고,

말씀을 깨닫게 하는 귀이며, 그 말씀을 품는 마음이다.

그래서 복음은 사람의 눈과 귀와 마음을 뚫고 빛으로 들어온다.

요한복음은 예수그리스도가

참 빛으로 오셨는데 어두운 세상이 깨닫지 못한다고 전한다.

캄캄한 방에 등불을 켜지 않고는 캄캄한 어두움을 몰아낼 방법은 없지 않는가.

빛이 오면 어두움은 사라지게 된다.

그런데 여전히 하늘 물정인 진리에 어두운 것은 빛으로 오신 하나님을 모르기 때문이다.

복음은 사람의 마음을 찌른다.

예수 복음이 사람에게 전달되면 두 종류의 반응이 나온다.

어떤 자들은 복음을 들으면 마음에 찔려 ‘어찌할꼬’ 애통하면서 회개로 나오는 은혜의 복음이다.

그러나 어떤 자들은 복음을 듣고 마음에 찔려하지만 ‘이를 갈고’ 돌을 던지는 심판의 복음이다.

예수복음은 믿는 자에게 모퉁이 돌이지만

믿지 않는 자에게는 거치는 반석이 된다.

칼을 쓰는 자는 칼로 망한다는 말이 있듯이,

돌을 던지는 자들은 산돌이신 예수의 심판으로 멸망을 당한다.

구원의 복음은

사람의 마음을 뚫고 들어와 찌르고 잘라 마음의 할례를 행한다.

하나님의 복음은 마음에 심겨지는 것이기 때문이다.

누가복음에서 시므온은

아기 예수를 보고 그는 ‘사람의 마음의 생각을 드러낼 것’이라 한다.

그렇다 말씀이신 그리스도는

어떤 검보다 예리하여 찌르고 쪼개며 마음의 생각과 뜻을 감찰한다.

율법의 할례는 죄를 잘라내는 모형이고,

복음의 할례는 그 죄의 덩어리인 육신을 잘라낸다.

이것을 구약에서 마음에 할례라고 말하고(신30:6),

신약에서는 육적 몸을 벗는 그리스도의 할례라고 말한다(골2:11).

복음은 육적 몸을 벗는 그리스도의 할례이다.

회개는 옷을 찢는 것이 아니고 마음을 찢는 것이다.

복음은 껍데기 신앙생활인 율법의 할례가 아니라 알맹이 신앙생활인 마음의 할례인 것이다.

나는 율법의 할례로 껍데기 신자인가, 마음의 할례로 알맹이 신자인가?

-제67회 말통축제(9-4) 율법의 할례와 마음의 할례?, 조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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9-3. 복음에 대한 반응?

바울은 디모데에게 네가 어려서부터 성경을 알았나니

성경은 능히 너로 하여금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믿음으로 말미암아 구원에 이른다고 한다(딤후3:15).

구원은 예수 안에 있는 믿음으로 받는 은혜의 복음이다.

그래서 요한계시록에는 성도들의 인내가

하나님의 계명과 예수 믿음을 지키는 것으로 설명하고 있다(계14:12).

예수 믿음으로 구원 받은 사람은 예수 믿음으로 환란과 핍박의 세상을 인내할 수 있다는 것이다.

복음으로 주어지는 예수 믿음은

사람의 생각으로 믿겠다고 하는 믿음과는 다른 것이다.

예수의 생각과 기준이 아니면

반드시 자기 뜻으로 나오는 자기 의이기 때문에 하나님의 영광에 이르지 못한다.

사람을 통해서 하나님이 영광 받으시는 것이 창조의 목적과 원리이다.

하나님은 복음을 통해서

인간의 타락으로 파괴된 창조를 새 창조하여 창조의 목적을 완성하시겠다는 것이다.

복음은 예수그리스도다.

예수가 믿어지는 하나님의 은혜가 임하면 성경과 복음을 오해할 필요가 없어진다.

예수가 믿어지는 사람은 복음을 통해 진리가 알아지기 때문이다.

혹시라도 예수 없는 사람이 진리를 알려고 하지만 알맹이 없는 가리지일 뿐이다.

알곡과 가라지는 겉만 보면 똑같아 보이지만 속은 다르다.

예수를 믿고 신앙생활을 해도 그리스도가 드러나지 않고,

자기 것만 챙기게 되면 투기와 질투가 생겨 꼭 예수 알맹이 없는 가라지처럼 살게 된다.

복음은 이런 알맹이 없는 삶을 날카롭게 잘라낸다.

거룩한 복음이 내 안에 뜨면 내가 맺은 의를 깨끗하게 청소한다.

또한 내 안에 예수 알맹이가 꽉 차게 열매를 맺게 한다.

나는 나의 의를 열매로 맺을 것인가, 예수의 의를 열매로 맺을 것인가?

-제67회 말통축제(9-3) 예수 알맹이와 사람 가라지?, 조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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9-1. 복음에 대한 반응?

교회를 아무리 오래 다녀도

전도, 구제, 헌금, 봉사, 헌신하는 것을 어렵게 생각하고 힘들어 하는 경우가 있다.

그런데 예수님을 믿고 복음에 눈이 떠지면 자기가 알아서 전도, 구제, 헌신하게 되어 있다.

그래서 복음은 복잡하지 않고 쉽고 가벼운 것이라고 주님이 말씀하신 것 같다.

예수복음이 있으면 말씀에 대한 깨달음이 생기게 되어 있고

마음에서 반응이 다르게 나타나게 되어 있다.

매사에 그리스도를 의지하고 자기주장을 내려놓고 그리스도를 드러낸다.

가정에서, 직장에서 또는 어디에서든지 자연스럽게 드러나게 된다.

복음은 사람 자신을 위해 살게 가만 놔두지 않는다.

그래서 하나님은 자기 이름을 위하여 사람을 의의 길로 인도한다.

복음은 사람 자신을 위해서 의롭게 살라는 것이 아니다.

그리스도가 십자가에서 죽으신 것은 만물의 위함이 아니고 사람을 위한 것은 분명하다.

그리스도가 사람을 사랑해서 죽으셨지만 하나님의 영광을 위해 살아나신 것이다.

그러므로 복음은 나를 위해 죽고, 그리스도를 위해 살아야 한다.

다시 말하면 죄에 대해 죽고, 의에 대해 살아야 한다는 것이다.

그러므로 예수그리스도가 나의 죄를 위해 죽으신 은혜는 하나님의 영광을 위한 것이다.

복음은 그 은혜로 살게 하여 하나님께 영광 돌리게 하는 것이 궁극적인 목적이다.

내가 하나님의 영광을 위해서 살 때 그것이 가장 자신을 위한 것이고,

나의 죄를 위해 죽으신 예수그리스도의 복음이 되는 것이다.

나를 위해 살 것인가, 그리스도를 위해 살 것인가?
나의 영광을 위해 살 것인가, 하나님의 영광을 위해 살 것인가?

-제67회 말통축제(9-1) 누구를 위해 사는가?, 조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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8-4. 그리스도 안에서 발견된 나?

성경에서 빼내심을 받은 자는 복이 있다고 한다.

회는 헬라어로 ‘에클레시아’이다. 불림을 받은 것이다.

왜 부르셨을까? 사명을 줄려고 부른 것이다.

그러므로 Calling 자체가 사명이다.

버스 운전기사가 갑자기 급정거를 하면 뒤에 있던 승객이 튕겨서 운전기사 앞쪽으로 가는 경우가 있다.

그때 당황한 승객이 기사에게 “저 부르셨어요?” 하면 웃지도 못할 황당한 상황이 전개된다.

하나님이 부르신 적도 없는데 무슨 소명이 있을까?

주께서 부르신 자들은 모두 사명자이다. 소명과 사명은 동전의 양면처럼 하나이다.

부르심은 받은 자는 모두 그리스도의 일군, 심부름꾼으로 부르신 것이다.

교사와 목사가 똑같은 의미를 갖고 있듯이 하나님의 동역자이다.

이 은혜를 모르면 거짓선지자 노릇과 거짓 왕 노릇을 하게 된다.

진짜 왕 노릇의 기준은 성령이 스승 되셔서 진리로 가리켜 주신다.

예수의 제자를 만들어 내며, 예수의 기준으로 살면서 예수그리스도를 나타내는 삶이 사명이다.

그리스도를 나타내는 동일한 사명을 가지고 다만 역할이 다른 사역을 하는 것뿐이다.

역할만 다르고 사명은 같다.

사명은 일군에게 맡겨진 하나님의 비밀인 그리스도를 드러내는 것이다.

나는 나를 드러내는가, 그리스도를 드러내는가?

-제67회 말통축제(8-4) 소명은 사명?, 조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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8-3. 그리스도 안에서 발견된 나?

교회에서 헌신, 봉사, 헌금하는 것을 남보다 좀 열심히 하는 사람들 중에는

그것이 하나님의 은혜인 줄도 모르고 자기자랑으로 나타내는 경우가 있다.

하나님은 그들의 인본적인 악을 쳐내신다.

야고보서에서는 하늘로부터 오지 않는 것은 세상적, 정욕적, 마귀적이라고 한다.

또한 혈통적인 족보도 쳐내신다.

아브라함의 혈통으로 태어난 유대인들에게 너희는 아브라함의 자손이 아니라고 한다.

유대인들은 정신이 번쩍 났을 것이다.

성경은 사람의 이야기가 아니고 하늘의 진리로 말하고 있는 것이 분명하다.

아브라함 자손에게 아브라함 자손이 아니라는 것은 의미심장한 것이다.

그들이 아브라함 자손이면 아브라함의 행사를 할 것인데

마귀의 행사를 하기 때문에 마귀 자식이라는 것이다.

성경은 지금 남 얘기 하고 있는 것이 아니다.  

성경은 나에게 해당되는 말씀이다.

이것을 잘 모르면 옛날 얘기와 남의 나라 역사에 불과한 것을 공부하는 정도가 된다.

다 나와 관련이 있다. 창세기부터 요한계시록까지 그렇다.

성경은 사람들에게 창조와 인생의 목적을 설명하고 있다.

그런데 사람들은 그 목적을 모르고 자신의 길을 가고 있다.

창조의 섭리 속에서 불순종하는 죄인에게 예수그리스도가 복음으로 찾아 오셨다.

혈통으로나 육정으로나 사람의 뜻으로 나지 아니하고

오직 하나님께로서 난 자들은 예수그리스도의 행사를 할 것이다.

나는 마귀(세상적, 정욕적, 마귀적)의 행사를 쫓는 육신의 정욕, 안목의 정욕, 이생의 자랑을 하는가,

나 죽고 예수 사시는 산제사의 삶인 예수그리스도의 행사를 하는가?

-제67회 말통축제(8-3) 마귀의 행사와 예수의 행사?, 조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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8-2. 그리스도 안에서 발견된 나?

자기의지로 열심인 신앙생활은 사실 별것도 아니다.

말씀을 통해 진리를 깊이 만나면

여태 누구를 위해서 어떤 생활을 했는지를 알게 된다.

자신을 위한 신앙은 종교생활이고

그리스도를 위한 신앙은 믿음생활이라고 해야 할 것이다.

신약시대의 바울도 최고로 신앙생활 잘하는 자였을 것이다.

그는 그리스도 안에서 자신을 발견하고

지금까지 해 왔던 율법적 행위와 자신에게 유익한 것을 배설물로 여겼다.

배설물은 똥이라고 한다.

그리스도 안에서 자신을 발견하지 못하면

배설물이 될 똥을 배에 채우고 머리에 쓰고 손에 들고 다니게 된다.

그래서 치매가 오면 똥을 바르고 있는 것이 아닌가?

영적인 치매가 딱 그런 것이다. 똥을 깨닫는 사람은 은혜인 것이다.

치매에 걸린 자는 자신이 치매에 걸린 것을 모르고 살게 된다.

그것이 치매이기 때문이다.

자신을 위한 신앙생활 또한 그렇다는 것을 본인은 잘 모른다.

치매에 걸린 세상은 고스톱을 하는 화투에서도 똥이 나오면 돈이라고 한다.

길을 가다가 똥을 밟기라도 하면 돈을 밟았으니 재수가 좋을 것이라고 한다.

세상 똥통에 빠진 자신을 발견하면 은혜 중에 은혜로다.

-제67회 말통축제(8-2) 영적치매?, 조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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8-1. 그리스도 안에서 발견된 나?

교회는 예수님을 만날 수 있는 은혜의 장이다.

교회에서 드리는 예배는 삶의 현장에서도 드려져야 한다.

그래서 예배는 예배자가 드려지는 삶이고 죽어지는 제사이다.

예배생활은 교회에서만 드리는 국한된 종교의식이 아니다.

교회에서 예수님은 만나지 못하고

예배행위만 열심히 드리는 자는 일상생활에서 불신자와 동일하게 사는 경우가 있다.

하나님은 예배자를 받기 원하신다.

예배는 전인격적인 인생전체를 드려진 것처럼 살라는 것이다.

진짜 예배생활은 삶에서 나오는 것이다.

-제67회 말통축제(8-1) 예배생활?, 조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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7. 믿음의 법?

하나님은 예수 믿음으로 구원 받은 자를 의인이라 칭한다. 죄인의 상태에서 은혜로 구원 받은 자는 법적으로 의인이다. 그런데 여전히 죄인의 상태로 사는 경우가 허다하다. 그것은 죄인 스스로 죄인의 상태에서 벗어난 것이 아니라 그리스도가 죄인을 대신해서 죽으시고 죄인을 의롭다고 칭했기 때문이다. 다윗이 '죄와 허물이 가려지고 죄 없다 하심을 받은 자는 복 있다'고 말한 것처럼 구원은 하나님 쪽에서 해석되어야 정확할 것이다.

하나님의 구원이 사람에게 주어지면 비로소 구원으로 인한 삶이 시작 된다. 구원 받은 사람 쪽에서 구원의 정의를 내리고 살아도 구원의 삶으로 살아지지는 않는 경우가 있다. 그것은 죄인이 복음을 뚫고 간 것이 아니라 하나님이 죄인에게 복음으로 눈과 귀와 마음을 뚫고 들어 왔기 때문이다.

복음의 핵심은 요한복음 9장에 나오는 태어날 때부터 소경을 눈뜨게 한 사건에서도 확인할 수 있다. 주님은 육신의 소경을 눈 뜨게 하고, 영적소경인 율법주의자들에게 너희가 진짜 소경이라고 한다.

복음의 핵을 놓친 사람들은 자기중심 신앙으로 예수를 믿는 신앙보다는 예수를 죽이게 되는 행위가 앞선다. 복음을 모르면 바리새인처럼 그리스도를 죽이는 종교생활을 하게 된다. 하나님이 복음으로 사람을 쳐내는 것은 사람의 행위가 믿음에서 온 것이 아니고 자기의 의를 세우려 하기 때문이다.

구제, 기도, 금식의 행위가 잘못된 것은 아닌데 뭔가 빠져 있으면 잘못된 것이 된다. 예수그리스도가 사람의 죄로 인해 죽으시고 그 죄인에게 예수의 의를 전가시킴으로 의인이라 하셨지만, 사람은 계속 죄를 짓는다.

요한일서에서는 하나님께로 난 자는 죄를 알지도 못한다고 말한다. 복음으로 내 생명은 이미 십자가에서 죽었으며 예수 생명이 나의 의가 되었다. 그 의는 죄를 알지도 못한다. 복음은 법적으로 의롭다 함을 받게 하는 은혜로 믿어지는 믿음의 법이 사람의 마음을 뚫고 들어 온 것이다. 그러므로 복음은 은혜로 주어지는 믿음의 법이다.

율법 외에 다른 한 법은 생명의 법과 성령의 법인 은혜의 복음, 그리스도다. 하나님의 은혜로 하나님의 의를 세우는 믿음의 법은 내가 하는 것이 아니고 하나님이 하게 하는 것이다. 내가 할 때 자기 의가 되고, 하나님이 하게 하실 때 하나님의 의가 세워진다.

-제67회 말통축제(7) 믿음의 법?, 조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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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 부활 생명의 실체?

성경 말씀을 알고 사는 것과 믿고 사는 것의 차이가 참으로 큰 것 같다. 하나님의 말씀을 아는 것에 대한 믿음이 없으면 ‘나도 아는데 안 되는 걸 어떻게’하게 된다. 이것은 여전히 지식을 중심으로 움직이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지식은 말씀으로 살게 하는 힘이 없다는 것을 쉽게 알게 해 준다.

말씀에 대해 사람이 깨닫는 지식으로는 말씀대로 살게 하는 힘은 없다. 그러나 하나님이 믿게 하는 믿음으로는 말씀대로 살게 하는 힘이 있다. 이것이 말씀에 대한 사람의 방식과 하나님의 방식의 차이다.

하나님의 말씀은 생명으로 살게 하는 비밀이 있다. 하나님의 생명이 아닌 것으로는 하나님의 말씀대로 살 수 없기 때문이다. 하나님이 성경을 통하여 말씀하신 중심 의도는 말씀대로 살 수 있는 방법이 있다는 것이다. 그런데 하나님은 사람이 말씀대로 살지 못할 줄 아신다. 여기서 비밀을 찾아야 한다. 사람이 말씀대로 살아보려고 하면 할수록 율법의 기준으로 하나님을 믿게 되고 율법의 행위로 살게 된다. 그런데 하나님은 말씀대로 살라고 하신다. 그것은 하나님 자신이 말씀대로 살게 하시겠다는 의도이다.

현재 내가 살고 있는 것을 하나님이 살게 하시며, 하나님이 나를 믿음으로 살게 하시겠다는 것으로 믿으면 말씀대로 사는 출발이다. 사람이 할 수 있는 것이면 복음이 아니다. 예수그리스도가 아니면 구원과 믿음의 삶은 발생하지 않는다. 사람으로서는 결코 할 수 없는 것이다. 하나님이 아니면 절대로 할 수 없는 것을 성경에서 요구하고 있기 때문이다.

'원수를 사랑하라'는 말씀은 사람이 못하는 것이다. 사람이 못한다는 것을 빨리 깨달으면 깨달을수록 빠르게 믿음의 사람으로 가게 된다. 하나님이 사람을 창조하시고 세상에 살게 하시는 원리를 알게 되면 하나님의 말씀이 이해가 될 것이다.

복음은 시대와 사건과 다양한 종류의 상황에서 그리스도를 말하고 있다. 이런 부분을 성경 66권은 매 권마다 자세히 설명하고 있다. 성경의 결론이 이해가 안 되고 말씀을 오해하는 것은 예수부활의 신비를 놓치는 것이다. 부활이 뭔지 깨달으면 지금 부활이다. 하나님의 나라가 이미 임했기 때문이다. 미래에 부활할 것이지만, 현재 부활한 개념으로 살게 된다.

-제67회 말통축제(6) 부활 생명의 실체?, 조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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