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연구모임/22 아가서'에 해당되는 글 1건

  1. 2012.09.24 사랑의 복음 120923

사랑의 복음

 

성경은 하나님이 쓰신 책이므로 사람의 지혜로 잘 이해가 안 될 수 있다.

그래서 설교를 통해서 복음을 선포하고 성경공부 시간에 설명하고 가르치는 것이다.

교회는 이일을 하는 것이고 성도는 이것을 배우는 것이다. 성도가 아닌 사람은 무슨 말인지 잘 모른다.

학생은 공부가 목적인데 만약 단순한 청강생이라면 이해가 잘 안 될 것이다.

성경은 사람 생각으로는 어렵고 이해가 잘 안 되기 때문에 하나님 말씀의 개념으로 이해해야 한다.

그러면 하나님의 말씀이 들린다. 이것을 기적이라고 한다.

 

성경은 시대와 사람을 넘나들면서 기록하고 있어서 시대적, 역사적 배경이 없는 사람들은 이해가 안 될 수밖에 없다. 그러므로 먼저 성경이 말하려고 하는 초점이 무엇인지를 알아야 한다.

교회에 대한 이해와 성경에 대한 이해를 사람의 생각과 기준으로 보는 것을 인본주의라고 한다.

교회에서 가장 좋은 것을 취하고 알려고 한다면 아마도 예수님 만나야 될 것이다.

교회에서 공부 잘하는 법이나 잘사는 법을 설명하는 것이 아니다. 역사를 배우는 것도 그 목적이 아니다.

우리의 인생이 다 역사이다. 인생은 세월을 살아오는 것이기에 역사로 기록 되는 것이다.

이스라엘 나라를 얘기하는 것도 아니다. 지리학을 배우는 것도 아니다.

성경은 어느 시대, 어떤 지역에서도 몽땅 그리스도를 설명하고 있는 초점은 놓쳐서는 안 된다.

역사와 지리와 그 외의 것 때문에 예수를 놓치면 안 된다. 이런 것은 다 그리스도를 전달하는 수단에 불가할 뿐이다.

 

물을 전달하기 위해서 물을 컵에 담아야 한다. 그 물을 먹기 위해서는 먼저 컵을 잡아야 한다.

컵은 물을 먹게 하기 위한 도구이며 수단이다. 이와 마찬가지로 성경에서 말하려고 하는 것은 예수그리스도이다.

이 예수그리스도를 먹이려고 동원된 도구와 수단이 신학이다. 이런 껍데기 보다는 예수를 먹어야 한다.

물(예수)을 설명하기 위해서 컵(신학, 역사)에 대한 얘기를 상대적으로 더 많이 할 수도 있다.

그러나 성경은 창세기부터 요한계시록까지가 다 하늘의 이야기를 말하는 것이므로 이것을 들어야 한다.

설교는 사람의 감정으로 말하고 전달하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메시지를 전달하는 것이다.

 

하나님의 말씀은 날카롭고 예리하기 때문에 마음을 찌르게 된다.

찌르는 말씀을 들어야 우리의 생명이 살아나는 기회가 될 수 있기 때문이다.

이것이 복음을 받아들일 수 있는 기회이다.

제가 우리 교회서나 다른 교회에서 똑같은 설명을 하는데 다른 교회에 있는 영혼들은 말씀을 생명으로 받아 드린다. 우리 교회에서도 복음이 선포 될 때 생명으로 받는 놀라운 축복이 있기를 원한다.

하나님을 만나려 교회 와서 밥 먹고 교제 하며 즐거워하는 것은 잘못된 것이 아니다.

그런데 하나님의 말씀에 대해서는 아무런 반응을 보이지 않는다면 하나님이 좀 섭섭해 하지 않을까?

 

하나님은 말씀으로 자신을 드러내신다.

 창세기에서는 창세기의 범주에서 자신을 드러내시는데 창조를 통해서 자신이 빛의 존재이심을 드러내신다.

또한 계시록에서는 계시록 범주에서 드러내시고 아가서는 아가서 범주에서 자신을 드러내신다.

청중은 자신 안에 있는 예수그리스도로 인해 말씀으로 자신을 드러내시는 하나님을 만나는 반응을 보인다.

그래서 우리는 설교를 평하기 전에 나 자신을 점검해야 한다.

어떤 사람은 개그콘서트가 방영되면 졸다가도 깨는 사람이 있고

또 어떤 사람은 축구를 하면 새벽에도 일어나 보는 반응을 보일 수 있다.

그런데 말씀 앞에서 우리의 반응은 어떤가? 영혼의 반응은 말씀으로 밖에는 조명이 안 된다.

말씀이 나에게 어떻게 반응을 일으키는지를 복음의 말씀으로 검증해 봐야 한다.

 

아가서는 주요 등장인물로 솔로몬과 술람미가 나온다. 아가서는 설교하기에 쉬운 책이 아니다.

솔로몬, 술람미를 히브리어로 쓰면 그 이름의 뜻은 모두 ‘샬롬(평화)’이다.

솔로몬은 다윗의 아들로 그가 출생하면서 나라에 평강이 왔다. 그가 왕이 되면서 태평성대를 누렸다.

아가서는 예수그리스도와 교회가 사랑하는 관계를 설명하고 있다.

모든 성경은 예수에 대한 이야기로 아가서에서는 그리스도의 십자가 복음이 숨겨져 기록되었다.

어느 성경에서도 십자가의 사랑은 빠지지 않는다.

하나님이 사람을 사랑한다는 뜻은 십자가에서 예수그리스도가 죄로 인해 죽으셨다는 뜻이 담겨져 있다.

 

성경은 부자가 되게 하고, 질병을 고치고, 세상의 모든 지혜를 가질 수 있는 법을 설명하는 것이 아니다.

이런 생각들은 인간 쪽에서 소망하는 것이다. 그러므로 하나님을 잘 몰라서 자기 자신이 실족하는 것이다.

이는 사람한테 실족 하는 것이 아니라 실제로는 하나님께 실족하는 것이다.

성경을 보면 어떤 사람은 예수님의 사랑이 거치는 반석이 되기도 한다.

어떤 사람에게 거치는 반석이 되는 것은 그리스도를 안 믿어서 죽게 되는 것이다.

또한 어떤 사람에게는 모퉁이 돌이 되어 그리스도 때문에 아름다운 성전으로 살게 된다.

그런 예가 예수님이 교회를 사랑하는 내용이다.

 

사랑한다는 것은 오병이어 기적이 아니다.

진짜 사랑하는 것은 고기를 잡아 주는 정도가 아니라 고기 잡는 법을 알려 주는 것이다.

그래서 주님은 자신을 먹어야 진짜 생명으로 살 수 있다고 말한다.

이것이 바로 사람의 생각과 차이가 있는 것이다. 하나님의 존재를 모르면 그럴 것이다.

사랑의 예수님이 이땅에 오시면 생명과 심판이 동시에 움직인다.

 

아가서의 뜻은 노래 중에 노래이다. 사랑을 노래하는 최고의 노래이다.

세상의 모든 노래는 거의 사랑을 노래하고 있다.

그래서 어떤 노래 가사에는 “사랑은 눈물의 씨앗이라고” 한다.

모든 노래의 주제가 거의 사랑이다.

요즘은 말 춤인 ‘강남 스타일’이 세상을 떠들썩한다.

사람들은 각자의 스타일이 있다. 생김새 감성, 성향 등 각자의 형태를 가지고 있다.

외성적 성향이라도 내면에서 내성적 성향이 있고,

내성적 성향이라도 내면에는 외성적 성향의 두 가지의 독특한 형태를 가지고 있다.

그래서 자기의 성향과는 다르게 내면에서 선호하는 스타일이 있다.

 

가수 싸이가 ‘강남 스타일’이란 노래를 통해서 사람들의 내면에서 선호하는 것을 노래로 부르고 있다.

많은 사람들이 특히 외국인들이 말 춤을 좋아하고 그런 가락을 좋아하는 것 같다.

이상하게 이 말 춤 스타일을 좋아한다는 것은 자신의 내면에 이런 스타일이 잠재하고 있다는 것이다.

하나님은 어떤 스타일일까? 아가서는 1장부터 8장까지로 8장에서 결론으로 내고 있다.

하나님의 스타일을 여기서 찾을 수 있다. 하나님은 어떤 스타일을 갖고 있을까?

성경을 통해서 하나님은 자신의 스타일을 드러내셨다. 그것은 바로 예수 스타일이다.

 

성경은 구약, 신약에서 질병을 고치는 것, 먹고 사는 것, 잘 살아야 되는 것 등

어느 것에도 맞추지 않고 오직 예수그리스도에게만 초점을 맞추고 있다.

그것이 예수 스타일이라는 것을 증명하는 것이다.

강남 스타일이란 노래를 들으면 사람들은 대부분 말 춤을 따라 춘다.

춤을 못 추는 사람일지라도 자기도 모르게 흥얼거리면서 말 춤을 따라 춘다. 마치 자기 스타일 인 것처럼...

우리도 예수 믿기 전에는 가요를 부르다가 예수 믿고 나서 복음성가나,

찬송가를 흥얼거림으로 바뀌는 것처럼, 술 먹던 스타일이 말씀 보는 스타일로 바뀌며 반응을 보이는 것이다.

우리의 스타일이 예수 스타일로 바뀌면 말씀에 반응을 보이게 된다.

내가 처음 예수 믿을 때 내 입에서 찬송가가 끊이지 않았던 적이 있었는데 내가 하는 것 같지 않았다.

 

내 속에서 원하는 스타일이 있는 것처럼 내 영혼의 스타일이 있고 내 육신의 스타일이 있다.

영혼의 스타일은 예수그리스도가 내 영혼을 채워 주는 하나님의 대한 열망이 있는 것이다.

어느 날 예수 스타일이 내 영혼에 들어와 버린 것이다.

그러면 성경에서 말하는 것에 반응을 보이게 되어 있다.

그리고 내 영혼이 말씀에 얼마나 갈급 하느냐를 확인해 볼 수 있는 좋은 기회이다.

내 영혼의 갈급함이 갈급 할수록 말씀으로 채우고자 하는 열정도 간절해진다.

내 안에서 진짜 예수 스타일이 움직이는지 아니면 세상 스타일이 움직이는지를 측정하는 것은 말씀 밖에 없다.

말씀을 듣고 싶든지 아니면 듣기 싫든지 두 가지 방법밖에 없다. 이것이 확인이 되면 기도할 제목이 된다.

 

교회에 일주일에 한번은 얼마든지 나올 수 있다.

내 안에 계신 그리스도가 반응을 보이냐는 것이다.

말씀에 반응을 보이는 결과치가 그 말씀에 따라가는 것이다.

복음은 단순히 예수 믿고 구원 받아 천국 간다는 것을 나 혼자 굳게 믿는 것이 아니다.

확인은 마음에서 하고 성령이 보증하는 것이다.

그리스도가 계속해서 나를 그리스도의 사람으로 밀고 가신다.

말씀은 나를 힘들게 하고 시험과 곤경에 빠뜨림이 목적이 아니라 그리스도인으로 살게 하려는 것이다.

말씀은 우리를 그리스도가 가셨던 길로 인도해 가는 것이다.

그런데 우리는 이 길을 가고 싶기 보다는 다 부자로 살고 싶고 교회도 커서 혜택도 받고 싶다.

이것이 공통된 생각이지만 만약 성경이 이런 것을 말하지 않는다면 성경의 초점을 찾아야 한다.

 

성경은 진짜 행복을 설명하고 있다. 근데 성경 말씀을 들으면 불편하다.

마음에서 전쟁이 일어나는 것과 같다.

사도바울은 이러한 현상을 로마서 7장에서 선과 악의 싸움이라고 말한다.

그러므로 구원의 증거는 이런 갈등과 고뇌 속에서도 발견할 수 있다.

예수 믿는 사람 안에 있는 하나님이 그를 구원 받는 사람으로 살아가도록 하나님이 하시는 것이 있다.

이것이 구원 받은 증거이다.

그러므로 구원의 복음은 하나님이 계신 것이 중요하며,

하나님이 계신 사람에게 하나님은 계속 말씀하고 계신다.

 

예수를 믿고도 술을 먹는 사람이 “술 취하지 말라”는 말씀을 들으면 찔리게 된다.

이렇게 살면 안 되는데 하는 갈등과 함께 예수그리스도가 내 안에서 찔림으로 온다.

복음이 있는 사람은 말씀으로 살지 못하며 불편하게 되고 갈등이 생긴다.

이렇게 살면 안 되는 정체된 현 상황에서 예수그리스도가 내 안에서 계속 의의 길로 인도한다. 이것이 복음이다.

하나님의 스타일은 예수 스타일이다.

하나님은 사람을 구원하는 예수, 사랑하는 예수, 죄로 인해 십자가를 지는 예수, 고난당하는 예수를 노래하고 있다.

말 춤에 반응을 보이는 것이 잘못 되었다고 설명 하려는 것이 아니다.

우리가 어디에 반응을 보이고 있는가를 확인해 보라는 것이다.

내 안에서 보이는 반응이 심장이 떨리는 반응이다.

내 안에 있는 예수가 복음을 설명할 때 마음에서 반응을 보이는 것이다.

마음에서 떨림을 경험하는 사람은 흥얼거리듯이 복음의 말을 하게 된다.

가슴에서 떨리는 것은 예수가 하는 것이다. 말씀을 느끼는 깨달음이 동일한 것이다.

그러므로 성령에 취했다는 것은 내가 하는 것이 아니라 내가 하지 않음을 고백하는 것이다.

가난하고 힘든데 “괜찮다”는 고백을 하는 걸로 증명된다.

이런 사람은 복음의 노래를 들을 때 내 안에 예수 스타일은 솟구쳐 올라온다.

내가 예수스타일이 선호하는 것은 은혜로운 믿음의 구원의 복음이다.

 

복음은 말씀을 듣고 마음에 확 찔림이 오거나 말씀 앞에 순종케 되는 은혜를 말하게 된다.

지금 인기리에 상영 되고 있는 ‘광해’라는 영화가 있다.

영화배우 이병헌이 ‘광해’라는 영화에서 왕의 역할을 한다.

광대가 왕 노릇을 하기위해서 왕처럼 말하는 학습을 받게 되면서 진짜 왕 흉내를 내게 된다.

하지만, 연기가 단순히 흉내 내기가 아니라

자신 속에 있는 또 다른 나를 끄집어내어 그 캐릭터로 동화 되는 것이다.

이병헌이 광해와 광대의 연기를 한다.

근데 그 안에 왕 또는 광대라는 캐릭터가 없으면 그 연기를 할 수가 없는 것이다.

 

우리 그리스도인들도 내 안에 예수라는 캐릭터를 흉내 내는 것이다.

이 예수가 내 안에 없으면 흉내 낼 수가 없다. 예수로 동화 되는 것은 예수화 되는 것이며 곧 왕 노릇이다.

내 안에 예수가 있는 데 진짜 예수의 캐릭터로 전환 되는 것이다.

그 예수 스타일의 캐릭터가 나를 사랑하고 축복하는 사람으로 바뀌게 하겠다는 것이다.

사람으로 사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자녀로 살게 하겠다는 것이다.

 

인본주의에는 죄가 붙어 있다. 이 죄를 복음이 날려 버린다. 이것이 복음이다.

내 안에 있는 자아를 칼날처럼 날려 버려야 복음이다.

반대로 인본주의가 예수를 날려 버리면 죄인 스타일을 살리게 된다.

세상에서 광대 같은 인생을 살고 있지만, 복음이 있는 자는 진짜 예수 스타일이 있다.

복음이 있는 자에게는 하나님 나라에서 진짜 왕이 될 것이냐

아니면 세상에서 광대 왕이 될 것이냐의 싸움이 일어나게 된다.

예수그리스도를 믿는 자들은 왕 노릇을 선택하는 것이다.

원수도 사랑해 보려고 하는 것이다. 이런 내용을 설교로 선포하면서 반응을 본다.

우리가정에서 레제나 하우스를 진행할 때 주일날 저녁은 주일 설교말씀을 물어 본다.

그런데 자녀들의 반응은 설교가 너무 길어서 기억이 더 안 난다는 것이고 적어 놓은 한 줄을 겨우 말한다.

그러면, 그냥 이해하고 넘어간다. 복음에 대한 확신이 없는 아이가 외워서 설명하는 것도 쉽지 않다.

또한 성경은 이상하게 복음의 확신이 없는 자에게 더 어렵다.

이제 우리는 선택을 해야 한다. 세상에 왕으로 온 예수는 복음이고 사랑이다.

 

아가서 8장이 결론이다. 너는 나를 인 같이 마음에 품고 도장 같이 팔에 두라 사랑은 죽음 같이 강하고 투기는 음부 같이 잔혹하며 불 같이 일어나니 그 기세가 여호와의 불과 같으니라(아8:6)

복음은 사랑만 말하지 않는다. 부모가 자녀를 훈계 할 때 매도 따른다.

이렇듯 복음에는 심판이 붙어 있다. 8:6절은 사랑의 결론을 말한다.

사랑은 죽음을 이기는 부활이다.

또한 사람은 시샘하는 투기와 같아서 세상을 사랑하는 자들데 대한 불같은 분노이다.

 

‘내가 사람들에게 고난을 내려 소경 같이 행하게 하리니 이는 그들이 나 여호와께 범죄하였음이라 또 그들의 피는 흘리워서 티끌 같이 되며 그들의 살은 분토 같이 될찌라 그들의 은과 금이 여호와의 분노의 날에 능히그들을 건지지 못할 것이며 이온 땅이 여호와의 질투의 불에 삼키 우리니 이는 여호와가 이 땅 모든 거민을 멸절하되 놀랍게 멸절할 것임이니라.(스바냐1:17-18)

 

이 사랑은 많은 물이 꺼치지 못하겠고 홍수라도 엄몰하지 못하나니 사람이

그 온 가산을 다 주고 사랑과 바꾸려 할찌라도 오히려 멸시를 받으리라(아8:7)

이 사랑은 홍수가 와도 꺼지지 않고 끌 수도 없다.

사랑이 움직이면 사랑받는 자만 사는 것이고 사랑이 없으면 죽는 것이다.

복음은 이것이 극명하게 드러난다. 십자가 사랑은 구원과 심판이 같이 있다.

복음은 그리스도와 십자가 은혜가 드러나는 것이다.

또한 복음은 나만을 위해 살게 하지 않는다.

나를 위해 돈을 벌고 살아야 되는데 복음이 이렇게 살지 못하게 한다.

그러므로 성경이 이해가 안 되는 것이다. 그런데 복음이다.

복음이 강력하게 움직일수록 나도 세상을 향해서 움직이는 것이 강력하게 움직이기 때문에 갈등하게 된다.

복음은 성경에서 말하는 곳으로 인도해 간다.

이것을 믿음으로 받아들이는 사람이 은혜 속에서 사는 것이다.

 

그런데 주일날 여러분의 얼굴이 왜 어둡습니까?

자식이 잘 안 되는 것도, 사업이 어려운 것도 다 하나님이 하시는 것이라 하면서.

복음은 계속 설명되어야 한다. 이 복음의 생명이 들어와야 가난해도 기뻐하며 살 수 있는 것이다.

성경은 우리를 살리려는 것이다. 복음 안에서 진짜 살려 보려고 것이다.

 

왜 복음을 들으면 힘들어 하는가?

사도행전 2장과 7장에서 극명하게 설명하고 있다.

사도행전 2장, 7장에서 사람들은 베드로와 스데반의 동일한 복음을 듣고

마음에 찔려하는 두 가지의 반응 곧 마음을 볼 수 있게 된다.

한쪽의 반응은 ‘어찌할고’하는 회개와 ‘이를 갈면서’ 돌을 던지는 무리가 있다.

사람의 마음을 찌르는 것이 복음이고, 복음을 듣고 마음에 나타나는 현상이 나의 모습니다.

내가 복음으로 못살므로 이를 갈게 되는 현상이 있다.

내가 어디에 서야 할지 위치를 빨리 선택해야 하다.

 

복음의 본질은 내가 100% 죄인임을 깨닫는 것이다.

나를 교회에 앉혀 놓는 것은 내가 제일 악하고 죄가 악질이라 먼저 구원하신 것이다.

이렇게 사랑해서 구원하여 목사까지 쓰시는 은혜를 알아야 한다.

그러므로 시험에 빠지지 말고 은혜에 빠지기를 축복한다.

 

아가서 1장의 입맞춤은

그 아들에게 입 맞추라 그렇지 아니하면 진노하심으로 너희가 길에서 망하리니

그 진노가 급하심이라 여호와를 의지하는 자는 다 복이 있도다(시2:12).

이는 구원을 설명하는 것이다. 죄인의 길에서 의인의 길에 서는 것이다.

고난 속에서 하나님을 보는 것이 복 있는 자이고

세상에서 잘살고 잘나가도 하나님을 위해 사는 자가 진짜 복 있는 자이다.

 

내 안에서 반응하는 것, 내 안에 예수의 스타일이 있는 자,

말씀에 반응을 보이는 자는 하나님과 친밀함을 느끼는 자이다.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사람은 말씀에 반응을 보이는 자이다.

몇 년 전 미국에서 만난 서우석 선교사님은 아프칸 선교를 통해서 좋은 사람을 많이 만나게 하신다.

그런 분이 우리 교회에 나올 줄은 생각지도 않았다. 죠이교회 소풍이 계기가 되었다.

서선교사님은 복 있는 사람 복된 사람이다. 영어를 가르쳐 주고 원어민을 매주 데려온다.

돈으로 환산할 수가 없다. 우리교회가 하는 이 프로그램은 아주 귀한 것이다.

이것이 복이다. 복의 기준으로 해석해야 한다.

귀하게 여겨 줌으로 서로 은혜를 주고받는 것이다.

영어를 못하지만, 가르쳐 주셔서 고맙다 라는 생각을 해주는 것이 여러분과 저와의 관계이지 않을까?

주일 설교시간이 길어도 믿음으로 반응을 좀 보여 주려고 하면 안 될까?

반응을 보여 주는 것으로 서로 은혜를 나누는 관계가 될 수 있다.

우리는 끝까지 사랑하고 축복 할 수 있는 관계이다.

그렇지 않으면 신앙생활이 재미없고 힘든 생활이 된다.

말씀과 생명을 주시는 하나님이 복음 안에서 새롭게 변화시켜 주기를 기도한다.

복음 안에서 반응을 보이는 하나님의 일꾼이 되는 성도가 되기를 기도한다.

Posted by 레제나
,